아마도 80년대가 저물어 가던 때로 기억됩니다.

항상 바쁜 회사생활이었고,

나름 직책상 책임감을 막 배워가던 시기였었어요.

출근하면 사장님을 모시고 월요회의를 하거나

평일은 각자 부서별로 정신없이 돌아가곤했지요.

저는 출근하면 디자이너로서 오늘 사용할 방안대지와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로트링 세트(0.1부터 굵기별로 수두룩…)

편집작업에 쓰일 각종 자들(일반 센치 자와 원형자 운형자, 스케일 등등)

더불어 다른 직원들은 손도 못대게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에어브러쉬 세트가 저의 책상 저 쪽 끝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요.

거래처에서 요구하는 심볼마크(Symbol mark))를 구상하거나 그리거나

때론 심볼과 비슷한 의미이지만 출시하는 상품의 네이밍에 걸 맞는 로고(Logo)를 그리곤 했죠.

주로 모노톤(Mono-tone)이 아닌 이상

그라데이션을 표현하기 위해 ‘에어브러싱’이라는 작업을 하게됩니다.

스케치가 끝난 원판 위에 피스테잎이라는 것을 사용하여 마스킹을 하고,

디자이너의 의도가 표현될 수 있도록 여러층의 레이어를 만들고

예리한 피스커터로 피스테잎을 잘라서 들어내고 잉크를 뿌리고,

다시 붙이고 이 번엔 다른 쪽을 들어내고 잉크를 뿌리고… 등등.

피스건을 여러개 두고 색상을 바꾸어 가며 이상한 행동을 계속 반복합니다.

수 없이 반복하면서 자기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단일톤을 고르게 뿌리는 것도 힘들지만,

그라데이션(현장용어 보까시)효과를 피스건을 잡고 고르게 뿌려 내려면

정말 고참님에게 얼얼하게 몇 대씩 맞아야 비법 아닌 비법을 알 수 있었죠.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 심오함이 느껴지기도 하답니다.

저야 뭐, 동네 마크나 3D처럼 돌출된 효과를 글씨체를 만들고

에어브러싱 작업으로 보기 좋게 만들거나 했지요.

사실 원판은 가까이에서 보면 그 피스커터가 지나간 자국들이 눈에 보이거나

피스잉크가 에어건의 트러블로 인해 곱게 나오다가

갑자기 굵게 뿌려져서 작품을 만든 디자이너는 그 흠집을 금방 알 수 있어요.

최종적으로 사용할 크기의 10배 정도는 크게 그려서 축소하는 것이기에

원판를 못 본 사람들은 “와 끝내주게 그렸네~”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허기야 저는 능력부족으로 그런 소리 많이 듣지도 못했지요.

어느 날, 회의결과.

프랑스인가?, 스페인인가?,

하여간 그 나라에 수출할 패키지를 종합상사를 통하여 오더 받아서 우리회사가 제작을 하게 되었고

종합상사에서 시간을 다 버린 관계로 데리버리도 촉박한 상품이어서 부지불식간에

저의 책상에 떨어진 ‘파사베스카(기억이 정확치 않음)’라는 브랜드의 패키지 제작에 몰두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연말이면 ‘100만불 수출상인지? 1억불 수출상인지?’ 운운하며

대통령께서 기업의 대표들에게 볼 품없이 만들어진 트로피 하나 던져 주며

씨~익 쪼개는 뉴스를 많이 볼 수 있었지요.

의당, 연말이면 종합상사(삼성, 대우, 해태… 등등)들은 각하의 눈 밖에 놓이지 않도록

열심히 뛰고 뛰어 수출실적을 채우기에 여념없었던 시기였답니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런 경우인데,

알고보니 일본과 우리나라에 사이에서 간을 보던 외국 바이어가

수출실적에 급급했던 우리회사 거래처로 간 것 이었죠.

그러니 이윤이 남고 안 남고가 아니었어요, 그 때의 시국이라는 것이…

어찌 되었든, 저의 책상에는 파사베스카 인지? 뭔지 모를 커다란 게맛살 박스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샘플(Sample package)도 어렵게 구한 것이라는 상사측의 이야기도 있었답니다.

샘플을 천천히 분석해 보니

게맛살 사진이 좌상단부터 패키지 전면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커버하고 있었고

나머지 면들에는 각각의 상표와 설명 등등으로 구석구석 채워져 있었답니다.

“똑같이 만들거나 최소한 95%는 같아야 한다”라는 괴상망측한 상사측의 애걸복걸도

저의 삐삐로 수차례 강조되고 있었죠.

숙고 끝에 ‘제가 해 보겠습니다’라고 사장님에게 보고 하였고

그 날부터 몇 년은 늙어 버린 구렁텅이로 발을 들여 넣게 되었죠.

수 차례 ‘아니 원판 필름도 없이 어떻게 디자인을 한단 말입니까?’라고

징징 짜기도 했음은 비밀입니다.(소문내지 마셔요…)

다른 것은 어찌어찌 해 볼 수는 있어도, 폰트(Font) 문제는 정말 어질어질 하더군요.

외국에서 만들어진 패키지에 사용된 폰트가 국내 굴지의 서체출력회사에도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한컴이니, 서울시스템이니 하여간 서체회사의 서체집을 뒤져도 똑같은 폰트는 찾기 힘들었어요.

당시 촉박해서 그랬는지 하여간 저의 눈에는 들어 오지 않았답니다.(충무로를 다 뒤졌죠)

상사측도 다급 했는지 바이어와 상의를 했나 봅니다.

폰트 문제는 몇 가지 보여 준 것들 중에 컨텍 되었지요.

메인 컷은?, 바이어도 모르겠나 봅니다.

하여간 국내에서 모사하여 촬영에 들어 갔고

충무로의 모 스튜디오에서 게맛살에 색칠하고 반짝반짝 빛나게 식용유 바르고 등등

사진 속의 게맛살을 하나라도 먹으면 사람이 바로 죽을 정도로

제가 별별 잉크를 칠해서 만들어 버렸죠. 허허

스튜디오 실장님과 스텝분들도

“뭐 이런 제품이 다 있네요?”

“게맛살이라고 한다고요?”

“진짜 게살인가요?” 등등 처음 본 음식에 다들 놀랐었지요.

하여간 페인트 칠한 게맛살은 먹지 않도록 옆으로 치우는 것도 중요 했답니다.

어찌어찌 디스플레이가 성공하여 촬영을 하였고

그 사진을 메인 컷으로 패키지의 얼굴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묘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메인 컷의 트리밍도 끝나고 서체의 편집작업도 끝나고,

이제 아직도 미완인 로트링작업이 남아 있었죠.

외국의 디자이너라 삶의 경험과 문화가 다르니

그 사람의 디자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는 것 이었고,

하여간 그대로 모사하기에 여념없었답니다.

디테일한 것들은 보통 몇 배는 확대를 하여 트레이싱지 위에 로트링으로 그리고

그 것을 암실에서 촬영하여 축소 본으로 인화지 출력한 다음 편집작업에 사용한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패키지 측면에 있는 이상한 의미의 막대 그래프들을 로트링 작업 하였고

작업하는 내내 ‘참 외국 디자이너는 뭐 이란 작대기에 연연하는지?’,

무슨 의미로 이런 것을 표현 하였을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답니다.

여차여차 본 인쇄에 돌입하고 인쇄소 감리를 나가고 톰슨과정을 거쳐

무사히 40푸터 콘테이너 여러 개에 실려 외국으로 나갔죠.

그 후 일상의 직장생활은 반복 되었고

때론 감흥없는 지루한 나날이라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후일담, 상사로 부터 그 때 그 오더 너무 잘 처리 되었다며 바이어도 국내 상사도 얼굴이 만개 했었어요.

더불어 참여했던 저 자신도 흡족했죠.

그리고 몇 년후,

“예, 그 때 제가 로트링으로 확대하여 그린 것이 바코드(Barcode)라는 것이었는데

바이어는 ‘한국에도 바코드를 만들고 사용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것’에 놀랐다”고 했다고요.

으악!

알고보니 그 때 제가 그린 것들이

바로 오늘 날 우리에게 친숙한 바로 그 바코드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로트링을 조그만 잘 못 놀렸어도

그 많은 40푸터 콘테이너의 물건들 다 클레임!

냉동 컨테이너 사용료에 유럽까지의 운송비용, 그리고 게맛살 제작비…

상사쪽 담당자도 저의 생각이지만 바코드를 정화하게 모르고 계셨던 것으로 보였고

더 하여 바이어도 사실 정확하게 몰랐던 것 같았어요.

저도 미래적인 음식의 표현 방법의 하나로 인더스트리한 분위기 표출을 위한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했고

마치 패턴(Pattern)처럼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런 생각이 확고 했었답니다.

헌데 그것이 잘 못 되면 큰 일 나는 바코드였다는 것…

이제 디자인이고 편집이고 다 던져버린 지금,

불현듯 마트에서 바코드만 쳐다보면 이 때의 일이 주마등 처럼 제 옆을 지나가요.

[뱀다리]

그 일이 있고 해를 몇 번 넘긴 다음 국내에서도 게맛살 광풍이 불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90년대 초에 바코드 제작 업체가 서울에 하나 있었는데,

의뢰를 위하여 사무실에 들어 갈 때

신분증을 데스크에 제출하고 신청서 작성하고

요금 지불하고 퇴실 할 때 주민증을 되찾았던 것으로 기억함.

당시 가격, 바코드 하나 당 42만원인가 47만원인가 했었음.

최근 게시글에 ‘바코드’관련 질문이 있기에 예전 망신글 좀 올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