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다들 잘 아시다시피 

청소년기 아들놈들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멍멍머...이게 아니고...

대개 자기 방에 각자 틀어박혀서 하루에 한두 번 얼굴도 잘 안 보여 주지요.

기껏해야 밥 먹을 때 나와서 식탁에 마주앉는 게 다인데,

그나마도 지난주에 마지막 급식을 먹은 큰놈은 

제 밥그릇 딱 챙겨서 거실 탁자로 옮기는 통에 마주 앉는 것조차 드뭅니다.

고딩 1년차 작은놈은 그나마 성격도 붙임성이 있고 

말도 좀 통하는 편이라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고 합니다만,

역시 가장 자주 하는 대화는 그거죠. "아부지, 오천 원만요..."

그래서, 그래도 얼굴 마주 보고 밥 좀 먹자고 가끔씩 맛집 데려가서 뭘 먹곤 하는데

지난주에는 분위기가 꽤 괜찮았더랬습니다.

웬일로 농담도 오가고 마침 음식도 맛있는데 

호로록 먹고 일어나는 음식이 아니어서 꽤 시간을 들여 대화를 할 수 있었죠.

뭐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내하고 만난 이야기며 연애한 이야기로 낄낄거리고 있었는데

작은놈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근데 제가 요즘 썸녀가 있어서 말이죠."

엄마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 들어서 딴소리를 하는데

저는 순간 얼음이 되었습니다. 고딩 1년차, 먹는 것도 시원찮고 

키도 제대로 못 커서 비리비리의 대명사인 놈이 썸녀라고? 말이 돼? 

하지만 그 다음 이야기는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얘가 뭐랄까, 그, 소꿉친구 같은 건데요."

하이고오... 아버지 학교 임지 따라 수십 번 이사하며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귄 아픈 기억 안 물려 주려고 한 자리 붙박이로 산 세월 이십 년에, 

기껏 만든 게 불알친구가 아니고 소꿉친구녀라고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얘가 못 생겼다는 거예요. 키가 저보다 한 뼘도 넘게 더 큰데 

볼살 퉁퉁하고 기골이 장대해서 완전히 오크녀야!"

아, 이거 어쩌죠. 밥 먹다 말고 일단 싸대기를 후려칠 수도 없고...



야 인마, 그러니까 그 썸녀가...

어렸을 때 목욕탕에서 만난 일까지 있는 소꿉친군데...

키가 너보다 한 뼘은 더 크면 기껏 고1에 최소 170은 된다는 거고...

볼살 퉁퉁하고 기골이 장대하다는 건 근육질이 아니라는 거고...

벌써 키 큰 놈 몇이 넘보는 걸 사정 없이 퇴짤 놨다는 건

최소한 기본 미모가 되는 건데 네 편한 눈에 못생겨 보인다는 거고...

그런데도 썸은 그 잘난 놈들 아닌 너하고 타고 있다는 거고...

야, 이 멍청한 둘째아들놈아! 네가 지금 여기 앉아서 애비랑 밥 먹고 있을 때냐??? 응???

너 일단!

용돈 인상!!!

그리고 여보!

얘 옷 좀 사 줘요! 그럴싸한 걸로!

아 이거...

어쩐지 치과에서 간호사가 "아버님..."하더라니,

잘 하면 시아버지 될 날도 머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충격과 공포입니다, 그지깽깽이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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