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커뮤니티에서 8~90년대 태풍, 폭우, 홍수 얘기가 있길래 보다가 생각나서...^^

제가 살았던 동네는 충청도의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외딴 섬 같이 주변의 산들과 연결되지 않고 평야지대 한가운데 뚝 떨어진 동네입니다. 

평지지만 약한 경사가 있어서 제일 높은 쪽에 저희 집이 있었고 제일 낮은 쪽에 초등학교가 있었지요. 

그래봐야 높이 차이가 2m나 되려나.... 

86년에 수해가 발생했었는데 동네 아래쪽은 물에 잠겼지만 저희 집은 비피해를 입지 않았더랬지요. 

그런데 1년 뒤인 87년 여름에 더 엄청난 폭우가 내렸습니다. 650mm 던가...

하룻밤에 내린 비의 양으로는 당시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우리나라 1년 강수량이 1200~1400mm 정도니까 1년 내릴 비의 절반이 하루만에 내린 거지요. 

게다가 마침 바다의 조수도 대조기를 맞아서 차오를대로 차오른지라

물이 빠져나가지를 못해서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된 겁니다. 

작년에는 멀쩡했던 동네 최대 고지대^^인 저희 집도 1m 이상 잠겼으니 말 다했지요 뭐. 

초등학교 2층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피 했었는데 2층에도 물이 올라와서 

다들 옥상에서 밤새 비를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논과 도로 위로는 모터보트들이 물살을 가르고.... 

기억나는 몇 가지 웃픈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1.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집들이 연탄을 사용했는데 

친구네 집에 겨울에 거의 다 사용하고 남은 10여장의 연탄이 남았더랍니다. 

연탄은 물에 잠기면 풀어져 버리기 때문에 이게 아까웠던 친구 아버지가 

비닐포대에 남은 연탄을 담아서 물에 안젖게 부엌보다 높은 방에 넣어뒀습니다. 

방까지는 물이 차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지요. 

그러나 친구네 집은 지붕 처마끝까지 물이 차올랐었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방안에 연탄이 녹은 물이 가득찼다 빠지면서 

모든 벽지가 검은 색으로 도색이.... ㅠㅠ

차라리 연탄을 포기했어야......... ^^

2. 연탄 관련 아찔했던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친구네 집과 반대로 연탄이 다 떨어진 우리집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여름 시즌에 연탄을 대량으로 구입하게 됐습니다. 

연탄창고에 어른 키 높이로 가득 채워두고 든든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지요. 

다른 가족들은 모두 대피한 상황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남아서 집 단속을 마무리하셨는데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할아버지가 먼저 출발하시고 아버지가 뒤에 오기로 하셨답니다. 

얼마쯤 가다가 할아버지가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돌아가 봤더니 

물 먹은 연탄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아버지가 연탄에 반쯤 묻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셨답니다. 

할아버지가 그냥 가셨더라면 아버지가 익사하실 뻔 했던.....ㄷㄷㄷ

수해 복구하는 동안 대학생 봉사단이 이틀 내내 젖은 연탄을 퍼냈다는.... ㅠㅠ

3.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자 전북 지역에 있던 군부대에서 미군 헬기를 동원해서 이재민을 구조했습니다. 

심각한 상황을 맞은 우리 마을과는 달리 이웃동네들은 대부분 산자락을 끼고 있어서 

지대가 조금이나마 높은 덕에 거의 수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쪽 언덕에 있던 교회로 대피해 있었기 때문에

도로 위에 헬리콥터가 내려앉아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 걸 멀리서 바라봤었지요.

그런데 제가 대피한 동네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실종됐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고 연락도 없다고 물에 쓸려내려간 것 같다고 

아저씨가 거의 실성해서 찾으러 다녔고 동네가 발칵 뒤집혔죠. 

그렇게 이틀동안 아주머니는 실종상태였습니다. 

이틀 뒤에 물이 어느정도 빠지면서 사람들이 복구를 위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실종됐던 아주머니가 구호물품을 잔뜩 안은 채로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다행이었죠. 가족들도 안도했구요. 수해도 안입은 집에 구호물품까지 득템하고 오셨으니^^

사연인즉 아주머니가 미군들이 헬기로 사람 구조한다는 얘기를 듣고 코쟁이들 본다고 구경갔는데

길 건너에서 구경하던 아주머니한테 미군 한명이 뭐라고 뭐라고 쏼라쏼라 하더랍니다. 

자기 보고 하는 말 같아서 가까이 갔더니 덜컥 손 잡아서 헬기에 태우고 군부대로~~~~~ ㅋ

사연을 들은 아저씨가 아주머니 머리채를 잡았다는 소식이.... ^^

4. 전대갈 정권의 끝을 달리던 시절이라 차기 대권 주자였던 노태우가 수해 현장 방문이라며 우리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뭐하러 왔냐며 계란을 던지기도 했다는데 우리 동네는 사람들이 온순했나 봅니다.

저희 집에도 물이 많이 들어찼던지라 가재도구 대부분이 물에 젖어 있었는데 그 중에 족보도 있었습니다. 

수해복구를 도와주러 멀리 사시던 큰아버지가 와서 도와주고 계셨는데 마침 젖은 족보를 펴서 말리고 계셨지요. 

그때 노태우가 동행한 국회의원(이겠지요?)들과 함께 우리 집에 들어왔고 엉겁결에 저는 노태우랑 악수를.... ^^

그들이 집에서 나가면서 문 앞에서 족보를 펴서 말리느라 분주한 큰아버지를 내려다 보며 

"어? 족보도 있네?" 라고 했고 순간 발끈한 큰아버지께서 

"국민들을 종놈 취급만 하더니만 뭐 당신들만 족보 있고 우리 서민들은 혈통도 없는 노비인 줄 아느냐!"며 

노태우 무리를 향해 일성을 하셨고 그들은 당황해서 쫓겨가듯 동네를 빠져 나갔지요^^

5. 1년 간격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재해예방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회의를 했습니다. 

바닥 공사를 해서 지대를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고 마을 전체에 제방을 두르자는 얘기도 있었고.... 

하지만 모두 큰 비용과 효과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결론이 나지 못했고 이 동네에서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이 불평들이 모아지자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가 되기 시작했는데 바로 집단 이주!

동참하는 가구들이 타 지역에 토지를 매입하고 연립주택을 지어 이사를 가기로 한 겁니다. 

결국 100여 가구가 살던 마을은 절반쯤 주민이 줄었고 동네 곳곳에 이빠진 것처럼 빈집이.... ㅠㅠ

오래지 않아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도 폐교되고 지금은 요양병원을 변한 것 같더군요. 

6. 저녁이 되면 화면조정시간이 끝나고 애국가가 나오면서 어린애들이 TV 앞에 둘러 앉던 시절이었지요. 

수해 났던 해 연말 쯤 무심코 TV에서 나오는 애국가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6개월 가까이 TV를 보면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장면이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헬기에서 찍은 수해지역 영상이 애국가 자막 뒤에 노래방 배경처럼 나오고 있었는데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도로나 지형이 구분이 안돼 몰랐는데 우리집이네요!?

하루에 한번씩 집이 전국방송에 나오고 있었다는...^^

다행히도 그 후로는 그런 심각한 재해는 있지 않았습니다만

가끔씩 태풍이나 폭우로 침수된 지역이 뉴스에 나오면 그때가 생각나곤 합니다. 

사람들이 물에 둥둥 떠다니던 수박 모른체 하며 발로 툭툭 차서 집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물에 떠내려가는 소나 돼지 구해다가 소는 비싸니까 주인 찾아주고 돼지는 동네 잔치용으로....^^



아 사진은 우리동네 아닙니다. 퍼왔어요^^